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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둘러보기

경주한옥민박 다루- 포석정지(포석정)

 

우리나라 국보 1호는 숭례문,

보물 1호는 흥인지문. 그러면 사적1호는?

국보 1호나 보물1호를 모르는 사람은 별로 없겠지만

사적 1호에 와서는 누구나 대답이 막힐 듯 한데

역사상 중대한 시설이나 그 자취를 이르는

사적(史蹟) 1호는 바로 경주 남산자락에

위치한 포석정지(鮑石亭址)입니다.

경주 톨게이트를 통해 고속도로를 빠져나와

오릉네거리에서 우회전하여 삼릉쪽으로 가다보면

왼쪽에 포석정지가 나타나는데 제법 너른 주차장에

차를 주차하면 바로 포석정지 입구에 다다를 수 있습니다.

포석정지 바로 옆으로는 남산으로 오르는 등산로도

자리잡고 있어서 등산객들이 자주 이용하는 곳

 

포석정은 의외로 그 규모가 별로 크지 않습니다.

양 옆에 서 있는 고목들이 훨씬

더 웅장해 보일 정도로 조촐한 규모입니다.

현재 정자는 남아 있지 않고 풍류를 즐기던

물길만이 남아 있습니다.

 

다듬은 화강석으로 만들어진 22m의 물길은

전체적인 형태가 전복 껍질 둘레와

같은 모습을 하고 있는데

 높낮이의 차를 5.9cm정도로 두어 서서히 흘러가면서

속도가 완만해지도록 되어 있습니다.

좌우로 꺾어지거나 굽이치게 한 구조에서 나타나는

물길은 오묘하게 뱅뱅 돌며 흐르게 되는데

물의 양이나 띄우는 잔의 형태, 잔 속에 담긴

술의 양에 따라 잔이 흐르는 시간이 일정하지 않다고 하니


그 특이한 형태의 시설은 세계에서 그 예를 볼 수 없는

그야말로 신라인의 독창적인 작품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원래는 남산 계곡에서 물이 흘러 내려오는 곳에 돌거북이 있었고

 그 입으로 물이 나오도록 되어 있었다고

하지만 지금은 남아 있지 않습니다.

 

학창시절 역사 시간에 포석정에  대해서

설명하시던 국사선생님께서는

 통일신라 말기 제55대 경애왕이

이곳에서 군인들을 모아놓고 술잔을 돌리며

흥청망청 연회를 벌이다가

후백제의 견훤에게 잡혀 자결하고 왕비를 비롯한

궁녀들은 견훤의 노리개가 되었다는 얘기를 해주셨습니다.

 

이후 마지막 왕인 경순왕이 세워짐으로

신라는 결국 패망에 이르게 되었다고 말하며

한나라의 왕이 나라를 돌보지 않고 흥청망청 포석정에서

 흥청망청 술잔치를 벌렸기 때문에

 통일신라는 망할 수 밖에 없었다며

한탄 섞인 이야기를 해주셨던 걸로 기억이 합니다.

 



지금까지도 포석정이 정확하게

언제 어떤 연유로 마련되었으며

 그 주된 용도는 무엇인지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고 있습니다.

 

다만 포석정 터에 남아있는 포석이 유상곡수연을 하던

유적이라고 한 해석이 설득력을 얻고 있는데

(유상곡수연(流觴曲水宴): 서기 353년

중국의 명필 왕희지가 명사들과 함께 개울물에 목욕하고

모임의 뜻을 하늘에 알리는 의식을 한 후 물 위에

술잔을 띄워 술잔이 자기 앞에 오는 동안 

시를 읊지 못하면 벌로 술 3잔을 마시게 했다는 데서 유래함.)

 

지난 1998년 5월 포석정 지역에서 '砲石(포석)'이라고

새겨진 신라기와편이 출토되어

이를 화랑세기에 나타나는 '포석사(鮑石詞)' 즉

'신주를 모시는 사당'으로 해석하는 견해가 발표되었습니다.

즉, 이곳이 국가의 안녕을 기원하고 귀족들의

혼례를 거행한 성스럽고도 경건한 장소였다는 합니다.

 

나라의 운명이 풍전등화와 같은 처지에 놓여 있는데

포석정에 군신들을 불러놓고

왕이 술 마시고 유상곡수연을 즐겼다는 것은

사실 상식적으로 납득하기 어렵고

나라의 안위를 위한 제사를 지내다 참변을 당했다는

해석이 오히려 설득력을 지닙니다.

신라를 밟고 세워진 고려인의 역사관으로 써진

삼국사기의 기록은 지금 재해석되고 있는 중입니다.

 

옛날 포석정 모습

 

 

신라 천년의 고도 보물창고,경주, 포석정

 [출처:유튜브]태믹스의 역사지식문화 콘텐츠

주변음식점은 

남산수라간, 부성식당, 남정부일식당, 우렁각시 우렁이쌈밥&보리밥이 있습니다.